국립중앙박물관 106 백제관 (무령왕릉,금동대향로,유물)

2016. 8. 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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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있어 국립중앙박물관 백제관에서 백제의 역사와 유물 등을 알아보겠습니다.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도에서 높은 문화를 이룩했던 고대국가답게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백제의 역사를 살펴볼게요. 백제는 1대 왕인 온조로 대표되는, 부여계 이주민들이 한강유역에 정착해서 세온 나라인데요. 마한지역을 통합하면서 그 영역을 확대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그 후 도읍을 웅진과 사비로 옮기면서 독창적인 백제문화를 꽃피웠다고 하는데요. 한기에는 국가체계를 확립하고 백제의 기틀을 다졌던 시기이고, 웅진기에는 고구려의 남진정택으로 약해진 국력을 회복하고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이며, 사비기에는 가장 융성했던 시기로 불교문화가 화려하게 꽃핀 시기라고 합니다. 

 

 

백제의 유물 중에서 최고로 인정받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모습입니다. 이 향로는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사용했던 향로로서 백제시대 왕실 무덤에 제사를 지내는 능산리절터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용 한마리와 연꽃 봉오리가, 삼신산과 봉향무늬 등 등을 자세히 보시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감탄하게 되실 거예요. 출토 당시 중국에서 수입되었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이 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에 백제적인 요소가 가미된 독창적인 유물이라고 하네요. 

 

 

박제는 대외교류를 통해 동아시아에 속에서 활약하였으며, 중국의 선진문물를 받아들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중국 도자기와 양직공도는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교류 관계를 보여주고, 왜왕에서 선물하였다는 칠지도는 왜와의 교류관계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양직공도는 중국 양나라 원제시설 소역이 왕자시절인 서기 539년 그린 사신도인데요. 원본을 복송에서 모사한 그림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는 양나라에 온 외국 사신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속에 백제 사신이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와 폭이 넓은 바지를 입고, 관모를 쓰고 검은 신을 신고 있는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서기 3-4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양모양청자이빈다. 강원도 원주 법천리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도자기 만드는 기술도 발전해서 청자를 생산하고, 그 수준도 아주 뛰어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비옥한 평야와 강을 끼고 있어서 바다에 인접한 지리적인 여건을 바탕으로 강력한 지방세력이 존재했는데요. 4~5세게 무렵에는 흙을 높게 쌓고 그 안에 커다란 독널을 매장한 거대한 고분이 이 지역에서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내부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고리자루칼 등 화려한 꾸미개가 부장되어 있었는데요. 5세기부터는 돌방무덤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돌널무덤 안에서 출토된 목걸리가 아주 화려하네요. 옥고 유리의 가공기술도 아주 뛰어난데요. 이 시기에 어떻게 이렇게 작고 정교하게 가공을 했을까요??

 

 

전남 나주에서 출토된 장검으로 금동과 은으로 제작된 것으로 칼자루 끝에서는 봉황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철기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면서 각종 무기와 농기구들이 철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요. 철기는 녹는점이 높은 단점이 있지만, 청동에 비해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둥근 고리가 있어서 고리자루칼이라고 부른답니다. 고리안에는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기도 했는데요. 칼을 사용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준다고 하네요. 

 

 

백제시대는 우수한 기술을 도이되면서 토기와 철기의 제작기술이 발전했습니다. 토기는 세발접시, 굽다리접시, 검은간토기 등이 제작되었고, 철 생산은 주로 지방에서 중앙의 통제 하에서 진행되었다고 하네요. 절기제작에서는 상감기법이 성행하였는데, 칠지도 및 은상감 고리자루칼 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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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라는 글씨가 새겨진 항아리입니다. 

 

 

단지와 그릇받침의 입니다. 그릇을 편하게 들 수 있게 받침이 키가 크게 만들어졌군요. 신기합니다. 

 

 

금동관모는 신분을 상징한느 꾸미개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무덤에서 출토가 되고 있습니다. 백제의 활동지역뿐만 아니라 가야와 일본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금동신발과 중국 도자기 등 고급 물품과 함께 부장되는 경우가 많다고 하네요. 

 

 

백제의 중흥기로 알려진 웅진기의 대표적인 왕,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관 꾸미개입니다. 왕관을 장식하던 것으로 인동당초무뉘와 불꽃무늬가 대칭형의 구도로 표형되어 있고, 달개는 달려 잇지 않으며,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아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무령왕을에서는 삼국시대 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확실히 밝혀진 무덤이라고 하는데요. 벽돌을 쌓아 만든 무덤으로 내부에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총 4,600여점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하네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귀걸이와 꽃모양 꾸미개의 모습이 감탄을 자아내는군요. 귀걸이를 장식하는 작은 조각조작을 한번 감상해보세요. 

 

 

백제시대의 토기들입니다. 벡제 사람들은 생활용으로 주로 사용했던 토기를 물론 앞에서 소개한 청자까지 제작을 했습니다. 청자는 토기보다 제작방법이 훨씬 더 어려운데요. 철기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불의 온도를 더 높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귀엽게 생긴 유리공이 있어서 찍어봤는데요. 충남 부여 하황리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앞에 구슬처럼 매달려 있는 것이 유리공이라고 합니다. 등불일까요?? 용도가 궁금해지네요. 

 

 

양산이라고 할 수 있는 햇빛가리개살의 꼭지모양이 아주 신기한데요. 우산이나 양산이 백제시대에서도 사용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어요. 그리고 꼭지부분까지 금동으로 만들어졌다니 양산이 엄청 화려했을 거 같네요.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견도니 "사택지적비" 라는 비석입니다. 백제 의자왕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요. 내용은 사택지적이 금당을 세우고 탑을 쌓은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 시대에는 문화가 발달하면서 문자의 사용도 보편화되었습니다. 주로 목간에 글씨를 썼는데요. 목간은 가늘고 긴 나무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종이가 나오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목간을 묶은 것을 책이라고 하는데요. 우리가 사용하는 책이라는 말의 기원입니다.

 

 

글씨를 쓸 때 사용하는 벼루의 모양이 아주 고급스럽네요. 왼쪽 벼루는 청자벼루입니다. 

 

 

보물 343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제시대 무늬벽돌입니다. 부여 외리에서 총 여덟 종류가 출토되었다고 하는데요. 네모모양의 벽돌은 크기가 일정하고 서로 연결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회화성이 아주 뛰어난 작품으로 당시의 예술과 건출, 종교와 사상적인 측면까지 살펴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백제시대 가옥의 지붕에 올리던 기와는 웅진기와 사비기를 거치면서 연꽃무늬로 주로 하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 확립되었습니다. 백제의 기와는 중국의 양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여서 발전시켰다고 하는데요.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궁궐과 사찰이 많이 세워지면서 양식도 다양해졌다고 합니다. 

 

 

삼국시대 2번째 시간으로 한반도의 서남부지역에서 700여년 세력을 떨쳤던 백제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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