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궁 창경궁 내전과 후원 (함인전,통명전,후원)

2022. 2. 3.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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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 거처하던 왕궁, 창경궁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습니다. 행사와 직무공간이었던 외전에 이어 이번 시간에는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내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요 건물은 함인전, 경춘전, 통명전, 성종대왕태실묘, 춘당지 등입니다.

 

 

창경궁의 외전와 내전을 구분짓는 빈양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담 넘어 보이는 취운정과 함인정인데요. 현재는 창덕궁와 창경궁은 담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원래는 하나의 왕궁처럼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일제시대에 완전히 분리했다고 하는데, 일제가 아주 고맙게도(?) 순종황제를 위로하기 위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대온실들을 만들어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관리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군요. 위로가 아니라 왕조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한 꼼수였겠죠.

 

 

내전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반기는 함인정은 사면이 개방된 정자와 같지만, 원래는 한면만 개방된 구조였다고 하더군요. 왕이 직무를 보던 편전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는데요. 아마 여름에 했을 거 같아요. 한면이 개방되었고, 온돌도 없는데 한 겨울에 직무를 보기란 불가능했을테니까요!

 

함인전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불교석탑과 우물터, 그리고 건물지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숭유억불정책을 폈던 유교의 나라, 조선의 왕궁에 불교의 석탑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인데요. 이 석탑에 대해서는 일제가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가져다 놓았다는 설과 창경궁의 건립 당시에는 불교탄압이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창건 당시부터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동궐도에 석탑이 그려지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전자가 더 설득력이 있는 듯 합니다. 석탑 앞에는 우물지가 있는데요. 이곳에 수락간이 있었다고 하네요. 

 

 

함인전의 앞쪽에는 환경전이 있습니다. 주로 왕과 세자가 살던 곳인데요. 옆에 있는 수락간과 함께 대장금이 활약했던 실제 장소라고 합니다. 중종이 경춘전에 있고, 대장금이 음식을 만들어서 받쳤다는 것이죠. 이외에도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가 죽은 장소이기도 하는데요. 병자호란 이후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청나라 황제에게 신임을 얻고 조선에 돌아오자, 아버지인 인조가 위기감을 느껴 독살을 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가장 높다고 하네요. 실제로 청황제는 인조가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인조를 폐위하고 아들인 소현세자를 왕으로 만들겠다고 인조를 협박했고, 보통 1년 동안 하는 세자의 장례를 10일만에 마쳤으며, 소현세자의 아내인 강빈도 얼마 후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사되지요. 한편 일제시대에 창경원으로공원화되면서 환경전이 관리사무실로 이용되면서 온돌과 같은 시설이 많이 훼손되었고 합니다. 

 

 

좀 우울한 얘기를 했군요. 환경전 옆에는 경춘전있습니다. 경춘전으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와 혜경궁 홍씨가 정조임금을 낳은 장소로 유명한데요. 먼저 정조의 얘기를 하자면, 경춘전에서 혜경궁 홍씨가 흑룡의 꿈을 꾸고 낳은 아들이 바로 정조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를 기념해서 흑룡그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춘전은 창경원 시절 전시관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환경전보다는 훼손이 적었다고 하네요. 

 

 

인현왕후 얘기를 해보면, 인현왕후가 취선당의 장희빈에게 밀려났을 때 중궁인 통명전으로 가지고 있고, 취선당과 아주 가까운 이곳 경춘전에 머물렀다고 하는데요. 가까이서 지켜보겠다는 여인의 한이 느끼지는 대목입니다. 경춘전 뒤 담 뒤쪽 지금의 취운당 부근이 예전에 취선당이 있었던 자리인데요. 취선당은 영조시절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장희빈을 몰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입니다. 음모론인가요?? ^^

 

 

이제 창경궁의 중궁인 통명전으로 가보겠습니다. 중궁 또는 중궁전은 왕비가 살던 장소로써 왕자를 생산하고 궁내 살림살이를 관장하며, 내명부를 총지휘하던 곳이지요. 사실 왕비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편한 것이 아니였다고 하네요. 할 일도 많고 이곳에 갇혀서 이동의 제한도 심했다고 합니다. 금으로 만든 감옥에서 산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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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전은 다른 전각과 조금 다른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궁궐 건물을 장식과 위엄을 상징하는 용마루가 없는데요. 통명전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왕자 생산을 위해서 하늘과 땅의 기운을 잘 받기 위해서 없다는도 하고, 용마루라는 이름에서 용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이 이미 있는 집에서 왕이 나올 수 없다는 이유로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두가지 주장이 일맥상통하는군요. 

 

 

통명전은 다른 전각과 달리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실내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실내로 들어서면 특이하게 마루에 현판이 걸려있는데요. 순조임금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통명전은 중앙에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침실이 마련되어 있는데요. 왕비가 왕과 합방을 할 때는 동쪽에 있는 방을 이용하고, 보통은 서쪽방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는 지금의 부부처럼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하는데요. 좋을 날을 택해 지밀상궁이 정해준 날에만 합방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잘 꾸며진 단청 사이에 전등이 걸려있는 모습이 이채롭군요. 조선 말 대한제국 시절 전기가 들어오면서 이런 광경을 만들어냈답니다. 

 

 

마루는 한국전통식으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끼워맞춘 구조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삐적거리는 소리가 나네요. 

 

통명전 옆 건물인 양화당으로 향합니다. 양화당을 인조임금과 깊은 관련이 있는 건물인데요.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부끄러워서 차마 왕의 거처에서 지낼 수 없다며 양화당에서 잠시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내가 절대 강자가 아니라면 세상의 변화에 잘 대처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좋은 군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옛 자경전터와 후원으로 항하는 계단으로 가면 집복헌과 영춘헌이라는 다소 소박한 규모의 전각이 나오는데요. 후궁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대장인 왕비는 통명전에 있고, 그 아래 사람인 후궁들은 그 옆 건물에서 눈치를 봤을 거 같아요. 물론 후궁이 왕의 총애를 받아서 집복헌과 영춘헌의 기세가 통명전을 압도했을 때도 있었겠죠. 

 

 

계단을 오르면 나무와 진달래가 만발한 작은 공터가 나오는데요. 옛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대비전인 자경전이 있었던 곳입니다. 가장 높은 위치에 있어서 경치가 좋고 자경이라는 이름이 어머니가 복을 누린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어머니를 위해 얼마나 잘 지었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제시절 이곳에 궁궐관련 박물관을 지었다가 민족말살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허물어버린 후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자경전 옆에는 바람을 관측하는 풍기대와 해시계로 잘 알려진 앙부일구가 있습니다. 풍기대는 부러진 것을 보수를 해서 아래와 위쪽이 색깔에 차이가 있습니다. 칼로 베어버린 거 같이 부너졌답니다. 풍기대 옆에는 앙부일구가 있습니다. 구름없이 맑은 날이라 해시계로 시간을 측정해봤는데요. 기간이 30분정도 느리더라구요.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시계는 일본동경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정확한 시간은 이 해시계가 맞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동경시를 사용하는 이유야 있겠지만,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합니다.

 

 

해시계를 지나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성종대왕태실묘가 나옵니다. 왕손이 태어나면 탯줄을 모아 이렇게 태실묘를 전국에 풍수가 좋은 곳에 만든다고 하는데요. 일제시절 관리를 하겠다면 전국에 있던 태실을 한데 모으는 일을 했는데, 공원으로 만들면서 구경하라고 성종대왕 태실묘를 이곳으로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태실에서 더 깊숙히 들어서면 후원공간이 나옵니다. 춘당지라는 넓은 연못을 중심으로 후원이 펼쳐져 있는데요. 예전에는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 후원과 함께 그 규모가 아주 컸다고 합니다. 지금은 춘당지는 예전에 왕이 벼농사를 짓던 논이었는데,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창경궁의 살림공간인 내전과 휴식처인 후원 일원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마지막 시간으로 대온실과 자연학습장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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